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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열국 쟁웅-고구려 전성시대

 

 

1. 대주류왕 이후 고구려의 상황
기원후 1세기에서 3세기와 4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남한강 이남의 남부 조선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 지역의 여러 나라는 막 태동하여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압록강 이남의 중부 조선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압록강 이북의 북부 조선 또한 대체로 기울어져 있었기에 이 시기 가라, 신라, 백제, 남낙랑, 동부여의 두 나라에서는 눈에 띄는 기록적 사건이 드물었다.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만이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며 여러 나라 사이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대주류왕 이후 고구려의 역사는 연대가 단축되면서 주요 사실들이 소실되어 역사적으로 상세히 논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중국 역사서에 근거하여, 고구려가 당시 중국과 선비족에 대해 정치적으로 관련된 일부 사건들만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2.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
고구려는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 속에서 자주 중국의 한(漢)과 충돌하였다. 기원후 1세기, 중국에 왕망이라는 지도자가 등장하여 독특한 정치 실험을 시도하였다. 그는 고대 사회주의적 성격의 정전법을 실행하고, 한문화를 바탕으로 세계를 통일하여 일종의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뿐 아니라 조선의 여러 나라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 역사는 수천 년 동안 왕조가 교체되고 군웅들이 경쟁하였지만, 실제로 백성을 위한 진정한 변혁보다는 권력 교체에 지나지 않았다.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일시적으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감면하고 요역을 줄여주는 등 임시적인 혜택을 제공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이전의 억압적 체제로 복귀하였다. 이 때문에 왕조의 교체는 혁명이 아니라 단순한 내란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왕망은 달랐다. 그는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토지를 평등하게 분배하고 계급을 없애자는 정전제를 실제로 실행하려 했다. 이는 동양 고대사에서 유일한 진정한 혁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전설은 기원전 5세기 춘추시대 말기에 등장하였다. 당시 각국은 귀족들이 사치와 권력을 독점하며 백성들의 삶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평균제인 정전제를 제창하였다. 그들은 “고대 하(夏), 상(商), 주(周) 왕조가 모두 정전제를 시행했다”고 주장했다. 이 제도는 900묘의 땅을 아홉 구역으로 나누어 여덟 가구에 각각 100묘씩 경작하게 하고, 나머지 100묘는 공동으로 경작하여 국가에 바치도록 하였다.

 

3. 고구려와 선비족의 관계
고구려는 한과의 대립 속에서 선비족과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 선비족은 조선 서북부와 몽골 일대에 분포한 유목민족이었다. 선비족은 흉노족에게 패배한 후 내몽골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그 후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불렸고, 다른 하나는 오환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고구려의 초대 왕 유류왕은 이들 유목 민족들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었다. 그는 직접 군을 이끌고 선비족의 전면을 공격하였고, 부하 장수 부분노는 후방으로 침투하여 선비족을 기습하였다. 고구려군은 선비족을 항복시키고 속국으로 삼았다.

한편, 오환족은 한나라의 무제 시기에 북부 지방으로 이주하여 흉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왕망 시대에 이르러 오환족은 한나라에 반발하였다. 왕망은 오환의 지도자들을 인질로 삼고 흉노를 공격하도록 압박했으나, 이들은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왕망은 인질을 모두 처형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으며, 이는 오환족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4. 왕망의 실패와 고구려의 대응
왕망이 패망하고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모본왕은 요동 지역을 회복하고 옛 고구려의 이름을 되찾으며, 선비족과 오환족과 협력하여 중국을 공격하였다. 이는 한나라의 광무제가 재건한 한 제국에도 큰 도전이 되었다.

왕망은 고구려를 정복하려 했으나, 고구려와 조선 여러 나라들은 연합하여 그의 군대를 자주 공격하였다. 왕망은 내부 개혁과 외부 확장 정책에서 모두 실패하였으며, 그의 정책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고구려의 이두 문자와 신수두교(新壽都敎)는 왕망의 한화(漢化) 정책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왕망의 언어, 문자, 종교 강요를 거부하였으며, 이는 왕망이 동방 정복에서 실패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왕망은 이처럼 타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한 채 자신의 사상과 체제를 강요한 결과, 내부 반란과 외부의 공격을 모두 이겨내지 못하고 패망하였다.

 

5. 결론
고구려는 대주류왕 이후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중국과 주변 유목 민족에 대응하며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특히 선비족 및 오환족과의 관계는 고구려가 중국과의 경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기여하였다. 왕망의 실패는 동아시아 각 민족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준다. 고구려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스스로의 문화를 지키고 주변 민족과의 외교와 전쟁에서 성공적으로 대응하며 동아시아의 강자로 자리매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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